경제논평

대학에 다니는 세 자매가 있었다. 첫째는 자유로운 영혼이고 둘째는 그냥 날라리다. 둘 다 성적은 언제나 C 학점이다. 셋째는 달랐다.  ‘All A’를 놓친 적이 없는 야무진 딸이다. 그런 막내가 어느 학기 뒤늦은 사춘기가 도래해 공부를 줄이고 사색을 즐겼다. 덕분에 성적이 B로 떨어졌다. 당황한 딸에게 아빠는 뭐라고 말할까?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다시 힘내” 아니면 “괜찮아, 아직 언니들처럼 되려면 멀었어. 좀 더 놀아도 돼” 중에서 고르라면.

국제기구 전문가들이 한국에 오면 판박이처럼 하는 말 중 하나가 한국의 정부채무는 OECD 국가 평균보다 한참 낮으므로 추가로 적자 재정을 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2019년말 현재 IMF 기준 정부채무-GDP 비율을 보면 OECD 평균이 110% 인데 비해 한국은 40% 수준이다. 그럼 지금보다 빚을 더 져도 괜찮은 걸까. 

그런데 이런 말을 우리나라 관료나 여권 정치인들이 똑같이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외국 전문가들이야 별 책임질 일 없는 사람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정부 재정을 걱정해야 하는 국내 관계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적자 재정은 정도가 심각한 경기 침체를 완화하거나 예기치 못한 외부 충격을 흡수해 미래로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잘 사용하면 유용한 정책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부채가 누적되면 여러가지 부작용이 생기기 때문에 선진국들 중에는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통제 장치를 가진 나라가 많다. 

일반적으로 별 탈 없이 허용가능한 적자나 부채의 수준이 얼마인지는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해당 국가의 구조적인 재정 추이나 경제여건에 따라 정답이 달라 질 수 있다. 당장은 다른 나라에 비해 경제규모 대비 부채비율이 높지 않아도 현재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에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또 인구 구조가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는 나라의 경우 미래의 재정 부담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재정 여력을 아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런 상식적인 고려를 무시한 채 한 시점을 기준으로 단순한 수치 비교를 하는 것은 잘못된 정책 제안으로 이어지기 쉽다. 나아가 OECD 평균과 같이 다수 국가가 속해 있는 집단의 평균을 비교 대상으로 삼은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우선, 집단 구성원 간의 편차가 클 때는 평균의 의미가 퇴색한다. 어떤 집단의 통계를 요약하는 가장 기본적인 변수는 평균과 분산이다. 예컨대 두 명의 학생이 엇비슷하게 50점을 받아 평균이 50점인 것과 90점과 10점을 받아 같은 평균인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1인당 GDP가 한 나라 국민의 생활수준을 가늠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은 소득분배 정도에 따라 중하류층의 실질적 생활수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OECD국가의 GDP대비 정부부채 비율의 분포를 보면 2020년 기준으로 일본 같이 200%가 훌쩍 넘는 나라에서 40~50% 수준의 나라까지 편차가 크다.  따라서 OECD 국가 전체의 평균은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런 수치를 국내 정책이 준거기준으로 삼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아무리 단기적 효용이 있다 해도 빚은 빚이다. 적정한 부채 규모가 얼마인가는 단기와 장기에 따라 달라지고 특정 국가의 사정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 외국 학자들이 GDP의 60~70% 수준이 기준점이라 말했다 해서 그것을 그대로 인용해 우리의 지표로 삼는 것은 곤란하다. 서구 선진국들의 통계를 바탕으로 한 이런 실증 분석은 참고 사항이지 따라해야 할 모범 답안이 아니다. 

나아가, 한 나라 고유의 정치 및 경제구조에 의해 영향받기 쉬운 재정 변수는 설사 생활 수준이 비슷한 나라라 하더라도 비교가 애매할 수 있다. 조세부담률 같은 변수가 좋은 사례이다. 시장경제 전통이 강한 미국과 복지 국가 성격이 강한 스웨덴 간에는 GDP 대비 세금 부담의 차이가 10% 포인트가 넘는다. 즉, 같은 선진국이라도 어느 나라를 비교 대상으로 잡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OECD를 선진국 모임이라 부르는 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구성원 간의 생활 수준 차이도 작지 않다. OECD에 가입한지는 25년이 지났지만 우리가 선진국 문턱을 넘은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국제비교는 잘 사용하면 도움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자칫하면 잘못된 정책을 합리화시키는 위험한 눈가리개가 될 수 있다. 충격 완화 장치로서 적자 재정을 사용할 수 있다지만 장기 구조적인 흐름과 해당 국가의 사정을 무시한 채 성격이 다른 나라들의 단순 평균치에 의존해 적정 부채 규모를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수준 이하의 발상이다. 한국의 GDP대비 세부담이 1980년대의 15% 수준에서 30여년 만에 두 배 가까이 증가한 것은 대단한 성과지만 향후 목표를 스웨덴의 45%로 삼는 것은 무모한 선택이다. 그들의 탄탄한 복지제도와 높은 조세부담은 정부 신뢰라는 변수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의 정부 신뢰도는 선진국은 물론 싱가포르 같은 주요 경쟁국 보다도 낮은 편이다.  

국제비교가 신뢰를 얻으려면 ‘비교할만한(comparable)’ 주제나 대상에 국한해야 한다. 예컨대 정부가 제공하는 복지는 생활 수준에 비례해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 GDP 대비 복지지출의 OECD 평균은 대략 20% 정도인데 앞서 언급한 정부채무나 조세부담률 같은 변수보다는 국가 간 편차가 훨씬 덜 하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복지지출이 GDP의 12% 수준이므로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추정이라 할 수 있다.

국제비교는 여러 측면에서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안에서 확정적인 정책 판단 기준이 되기 어렵다. 재정정책처럼 정치성이나 역사성이 두드러지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같은 부모한테서 태어난 세 자매도 나름의 개성이 있다. 각자 최선을 다하도록 도와줘야지 억지로 규격에 맞추려면 나쁜 점만 서로 배운다. 가뜩이나 늘어나는 정부 빚이 걱정인데 더 사정이 나쁜 나라를 보고 따라 하자는 식의 발상이 어떻게 나오는지 신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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